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쳇 베이커 (문단 편집) === 솔로 활동과 리즈시절 === 그나마 멀리건이 대마초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죄를 뒤집어 쓰면서 쳇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덕분에 멀리건 쿼텟은 리더가 1953년 9월에 [[징역]] 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붕 뜬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판타지 레코드의 프로듀서 딕 복은 수감된 멀리건 대신 여전히 인기가 있던 쳇에게 새로운 쿼텟을 결성해 음반 작업을 할 수 있겠냐고 떠보기 시작했다. 쳇은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럽다며 주저했지만, 이내 그 동안 자신과 친해진 피아니스트 러스 프리먼과 함께 그 제의를 받아들여 쿼텟을 만들고 리더로서 첫 음반 녹음과 클럽 공연을 시작했다. 쳇의 쿼텟이 취입한 녹음은 멀리건이 수감되어 있었던 그 해 가을에 [[LP]]로 발매되었고, 다운비트를 비롯한 유력 재즈 잡지들이 호평을 하면서 쳇도 [[루이 암스트롱]], 디지 길레스피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본좌]] 재즈 트럼페터의 대열에 들기 시작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쳇은 잭 몬트로스가 편곡한 곡들을 셉텟(7중주단) 체제로 녹음한 후속작 'Chet Baker Ensemble' 을 추가 취입했고, 이어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의 힘을 빌어 당시 유행한 스트링 앙상블을 대동한 [[발라드]] 위주로 제작한 앨범인 'Chet Baker & Strings' 가 뜻하지 않게 대박을 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3개월의 형기를 채운 뒤 가석방된 멀리건과 쳇 사이의 거리감과 시기심은 예전보다 더 심해져 있었고, 결국 이들은 결별하게 되었다. 멀리건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고, 쳇은 루이 암스트롱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공연 프로모터 조 글레이저의 기획으로 1954년 3월에 전미 순회 공연까지 진행했다. 그 직전이었던 1954년 초에는 처음으로 트럼페터가 아닌 보컬리스트로 취입한 '[[Chet Baker Sings]]' 가 퍼시픽 재즈 레코드에서 출반되었는데, 다소 어눌한 오클라호마 사투리 억양과 느슨하면서 '남성적이지 못한' 앳된 목소리가 호불호를 심하게 갈라놓았다. 하지만 스트링 앙상블과 협연한 앨범처럼 커버에 인쇄된 쳇 자신의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었고 일개 마이너 음반사에 두둑한 매상을 안겨줬다. 순회 공연으로 재미를 본 글레이저는 1954년 5월에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버드랜드에서 쳇의 밴드를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와 공동 출연시켜 각각 2부와 1부 공연을 맡도록 했다. 하지만 서부 재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백인 뉴비가 이쁘장하게만 연주하는 유약한 재즈' 를 거부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친 비밥 성향의 비평가들은 마일스 밴드의 연주를 높이 평가하고 쳇 밴드의 연주는 혹평하는 등 상당히 냉랭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흑인 재즈맨 대부분이 자신의 연주를 달갑잖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확실히 인식시켜준 이 공연 덕에 쳇은 이후 평생 동안 아버지 체스니가 가졌던 것과 비슷하게 흑인 재즈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또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에 자신의 성공에 중요한 밑밥을 깔아준 [[찰리 파커]]가 쳇에게 마약 살 돈을 빌리러 오는 등 약과 관련된 유혹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쳇이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역으로 첫 아내 샬레인과의 부부관계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샬레인은 남편이 잘해주지도 않는데다 순회 공연마다 여성 팬들에게 둘러싸였던 쳇을 정말 싫어하여 일부러 쳇의 친구들과 검열삭제를 했고 그것을 알게된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만다. 그러다 쳇이 뉴욕에서 프랑스 여성 릴리앵 퀴키에와 동거하며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폭발하여 쳇이 호신용으로 준 [[권총]]을 들고 버드랜드로 찾아가 릴리앙을 쏴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지경까지 갔다. 결국 2년 뒤 쳇과 샬레인은 이혼하고 말았다. 하지만 쳇은 사실 릴리앵과도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고, 밴드를 이끌면서 금전 문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멤버들에게 연주료를 제 때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러스 프리먼이 쳇 대신 재정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는데, 1954년 10월에 쳇이 다른 멤버들의 연주료를 삥땅쳐 자동차를 구입한 것이 발각되자 프리먼은 결국 이에 분노하여 탈퇴하고 말았다. 퍼시픽 재즈 레코드는 쳇의 금전 감각이나 밴드 리더로서의 역량, 사생활 같은 골치아픈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계속 쳇을 여성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 만드려고 했다. 1955년에는 스트링 앙상블 협연 앨범과 보컬 앨범의 컨셉을 몽땅 뒤섞은 'Chet Baker Sings and Plays'가 출반되었다. 여전히 재즈 비평가들은 쳇의 앨범을 혹평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심지어 '지옥의 수평선' 이라는 [[B급 영화]]에서 영화배우로 데뷰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높아가는 인기와 별개로, 쳇의 밴드에는 구제불능의 마약증독자들이 계속 영입되었다. 드러머인 피터 리트먼은 아직 10대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 차례의 약물 중독으로 입원한 경력이 있던 문제아였고, 피아니스트인 딕 트워드직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동시에 심각한 중증 헤로인 중독자였다. 여기에 퍼커셔니스트이자 엔지니어였던 빌 러프버러는 [[대마초 브라우니|쿠키에 대마초를 넣고 구울 정도]]로 심각한 대마초 중독자였다. 1955년 9월에는 처음으로 [[유럽]] 순회 공연을 했는데, 유럽의 청중들은 쳇의 트럼펫 연주는 호평했지만 그의 보컬 실력에 대해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공연 중에 전위적인 음악을 좋아하던 트워드직이 동료이자 마찬가지로 전위적인 작곡가 밥 지프의 곡을 가져왔고, 쳇은 이 곡들을 프랑스의 마이너 음반사 바클레이에 녹음해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보기 드물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곡을 연주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국보다 비교적 마약에 관대했던 유럽, 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풍토 덕에 베이시스트 지미 본드를 제외한 모든 밴드 멤버들이 그야말로 약에 취해 공연장과 클럽을 전전하는 등, 전체적인 일정은 완전히 개판이었다. 그 와중에 트워드직이 순회 공연 중이던 10월 21일에 묵고 있던 호텔에서 마약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쳇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충격에 빠진 채 공연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쳇은 혼자 유럽에 남아 이런저런 연주자들로 벼락치기 밴드를 만들어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하지만 급하게 긁어모은 연주자들의 수준이 들쑥날쑥해 합주력은 [[시망]]이었고, 쳇도 트워드직의 죽음으로 인한 [[멘탈붕괴]] 때문에 솔로에서 갈피를 못잡거나 심한 [[삑사리]]를 내는 등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어진 공연들도 대부분 혹평을 받거나 얼마 안되는 청중만이 온 가운데 치러졌고, 쳇 자신도 공연 보다는 마약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